1907년 1월 14일로 널리 기록되는 평양 남자 사경회 마지막 무렵, 길선주 장로는 친구의 유산 일부를 사적으로 취한 죄를 고백했다. 회개는 곧 회중 전체의 울음과 기도로 번졌다.
01 · THE NIGHT
고백은 말에서 끝나지 않고
배상으로 이어졌다
장대현교회에 모인 이들은 성경을 공부하고 저녁 전도 집회에 참여했다. 윌리엄 블레어의 설교와 기도 뒤, 길선주의 공개 고백이 이어졌고 회중은 각자의 죄를 소리 내어 기도했다고 여러 기록은 전한다.
동시에 통성기도의 기원을 단 한 밤으로만 환원해서는 안 된다. 한국의 공동 기도 관습, 사경회 문화, 원산에서 이어진 회개 운동이 평양의 집회를 준비했다.
02 · BACKGROUND
을사늑약 이후,
나라의 앞날이 흔들리다
1905년 을사늑약 뒤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일본에 빼앗겼고, 사회에는 상실감과 저항이 커졌다. 평양은 상업과 교육이 성장하는 도시였으며 기독교 학교와 병원, 교회가 새로운 지식과 조직의 통로가 되었다.
부흥을 정치와 무관한 내면 운동으로만 보는 해석과, 민족운동의 직접 원인으로만 보는 해석은 모두 부족하다. 일부 선교사는 정치적 중립을 강조했지만, 교육받은 한국인 신자와 교회 조직은 훗날 3·1운동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길선주 역시 1919년 독립선언서 민족대표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03 · PEOPLE
선교사의 운동에서
한국 교회의 운동으로

회개를 공적 책임으로 만든 지도자
1897년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1907년 평양신학교 첫 졸업생이자 한국 장로교 최초 목사 안수자 일곱 명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새벽기도를 널리 정착시켰으며 순회 부흥사와 목회자로 활동했다.
1903년 원산의 로버트 하디는 한국인 앞에서 자신의 교만과 선교 실패를 고백했다. 그러나 1907년 평양의 정점은 한국인 지도자와 회중이 더 이상 수동적 수용자가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길선주, 장대현교회 신자들, 전국의 사경회 참가자들이 운동의 주체가 되었다.
04 · TIMELINE
원산의 고백에서
전국의 사경회로
05 · FACT CHECK
민족과 신앙을
한 문장으로 묶지 않기
평양대부흥을 읽는 세 기준
- 핵심 집회의 날짜는 자료에 따라 1월 6일, 14–15일 등 다르게 서술된다. 이 글은 학계와 교계에서 가장 널리 기념되는 1월 14일을 정점으로 표기하되 집회가 1월 초부터 이어졌음을 전제한다.
- ‘동방의 예루살렘’은 평양 기독교의 성장상을 나타내는 후대의 별칭이다. 당시 도시 전체가 단일한 신앙 공동체였다는 뜻으로 쓰면 안 된다.
- 부흥이 한국인의 정치 참여를 약화시켰다는 주장과 민족운동을 곧바로 낳았다는 주장은 모두 논쟁적이다. 신앙 각성과 교육·조직의 성장, 식민지 현실 사이의 복합 관계로 보아야 한다.